** 사알짝 스포일러성...^^;;;
<사생결단>의 미덕은 물론 현실감 있는 시나리오에 있지만 인물과 시나리오 전개 방식 속의
미덕은 '원래는 착한놈(혹은 의리파)였어'라거나 나중에는 서로의 끈끈한 의리를 확인한다는 식의 결말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상도든 도경장이든
상도의 삼촌이든 부산지검 검사든 누구도 정의라거나 의리 따위를 위해 싸우거나 선택하지 않는다.
도경장의 마약쟁이/업자를 잡고 싶어하는 욕구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직업의식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마약쟁이/업자는 범법자'라는 공식과 '범법자는 잡는다'라는 공식에 따르는 기계적인 사고방식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자식들 나쁜 ×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배경과 그들의 행동 사이의 개연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나리오가 갖는 사실성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 설정과 이야기의 배경이 사실적일 때는 인물이 내리는 결정의 많은 부분이 당위성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당위성이란 그 행동이 객관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하기까지 해당 인물이 겪었을 갈등이나 그런 선택을 하게 되는 해당 인물의 사고의 흐름과 연관지었을 때 '그 사람/그의 상황'이라는 줄기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도와 도경장은 영화 내내 나쁜 놈으로 보이지만 '내가 저런 상황에 있다면?'이라고 자문했을 때 자신있게 저들과 다를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상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상도는 쉽게 '나쁜 놈'이라고 '벌 받을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 상도가 삼촌을 그렇게 경멸하면서도 자신도 약장사의 길을 택한 것은 단지 어린 나이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의 가슴 속 깊이 새겨진 그들(마약업자와 중독자)에 대한 증오가 오히려 그가 그 길을 가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즉, 이왕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자신이 인간 쓰레기처럼 여기는 존재들을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 말이다. 어차피 그들은 상도 자신이 아니더라도 그 늪에서 계속 허우적거릴 테니까.

'누가 더 나쁜 놈일까?'라는 질문이 영화 관람 후에는 의미 없는 질문으로 느껴진 것도 상도와 도경장은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상도가 늘 막다른 골목에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도경장은 비교적 많은 옵션을 가진 것으로 보여서다.
상도는 끝까지 막다른 선택을 강요 받는다. 그의 지난 인생이 그가 선택은 했으나 외부의 힘이 강력했듯이 그의 생사도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결정된다.
상도에게 연민이랄 수도 있는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그 비극이 오히려 이 영화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는 결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 인생이 늘 해피엔딩은 아니니까. 오히려 많은 수의, 상황에 쫓겨 다니는 인생들은 그렇게 보다 상층(사회 구조상)에 있는 인생들의 계획에 밀려 어이없는 비극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마지막 씬의 도경장의 도발이 처음에는 도경장이라는 인물 설정에서 살짝 튀는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장철이라는 마약상을 처단하고 싶다는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오랜 시간 쫓아온 '원수'같은 사내에 대한 처단이었던 것
같다. 또, 그 감정의 밑바닥에는 상도의 다소 억울한 죽음에 대한 '연민'과 '인간애'보다는, 비록 언젠가는 잡아야할 대상이지만 어느 순간
파트너 같은 존재가 돼버린 상대를 잃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허전함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사생결단>은 사실, 여성인 내가 보기에는 다소 불편한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인 지영의 역할이 누군가의 애인과 마약 범죄의 피해자를 거쳐 '남성'에 의해 구제되고 보호받는 역할로 머무는 동안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부분이 부각되는 면이 있다. 따라서 실제 마약 범죄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이 영화 속 지영의 역할과 별 다르지 않다고 해도 여성주의 시각에서는 분명히 비판의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사실 <바이준>과 <후아유> 감독의 작품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폄하할 수 없는 이야기의 사실성과 현장감, 뻔하지 않은 구조와 주조연을 모두 아우르는 탄탄한 인물설정 등에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두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토를 달 수 없이 훌륭했고 이도경, 김희라 등 중견 배우들 뿐 아니라 추자현, 온주완 같은 젊은 조연 들의 연기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의 공은 시나리오에 돌리고 싶다. 누가 뭐래도 <사생결단>의 미덕은 현실감 있는 시나리오와 개연성 있는 인물 설정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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