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5월 15일 서울극장에서 열린 기자 시사회에 온라인 프리미어 이벤트를 통해 당첨되어 참석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온라인 프리미어 사이트에 '시사회 참관기' 코너에 실렸습니다. 이곳에는 프리미어 버전과 조금 다르게 다듬어서 싣겠습니다.

<구타유발자>들의 토박이들은 보통 사람들의 세련되고 현대화된 상식과 매너에서 동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거친 말투와 다듬어지지 않는 행동, 일상화된 폭력이 그들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심지어 오근(오달수)의 모습은 원시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인정(차예련)과 교수(이병준)가 그들의 친절도 친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서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인정과 교수의 그런 불편함과 두려움이, 처음에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성악과 교수와 서울에서 온 예쁘고 젊은 여자에게 호의를 베풀던-비록 자루 속에 현재를 가둬두고는 있을지라도- 봉연 일당의 폭력성을 폭발시키게 된다. 자신들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비상식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바라보는 오만한 도시인(또는 지식인)의 시선이 그들을 도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봉연(이문식)을 더욱 도발한 것은 단지 그 두 사람이 지닌 불편함 때문은 아니다. 봉연은 어렴풋이 인정과 교수 사이에 발생했을 일에 대해 짐작하고 있다. 사회적인 명성이 있고 그 입으로 비폭력을 말하고 있지만 교수도 폭력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것을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비폭력과 상식을 가르치려 했고 그것이 봉연을 더욱 자극했을 것이다.
봉연 일당의 무차별적인 폭력은 현재(김시후)로 하여금 강해질 필요성과 폭력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폭력을 행하게 한다. 왜소하고 연약해 보이던 현재는 그 폭력을 극단까지 끌고 가게 된다. 그러나 현재를 향한 봉연의 폭력-초반에는 개연성마저 없어 보이던 고등학생을 괴롭히는 성인의 폭력- 또한 과거로부터 유전된 것이며 그의 폭력성향과 현재에 대한 감정은 오근, 홍배(정경호), 원룡(신현탁)의 폭력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조장하고 도발하기까지 한다. 즉,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서로에게 구타유발자가 된다. 감독이 무게를 실은 쪽도 후반부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여덟 명의 인물 중에 끝까지 폭력성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인정이다. 좋게 해석하면 여성을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 영화에서 여성은 폭력의 피해자로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인정이 교수-봉연 일당으로 이어지는 가해자들 사이에서 끝까지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존재로 남기 때문에 불가피한 설정을 감안하면서도 폭력을 거부하는 군계일학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일곱 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여 어쩌지도 못하는 여린,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인정과 교수가 낯설고 외진 곳에서 겪는 폭력의 현장은 어쨌든 끝을 본다. 해피엔딩이라고도 비극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운, 결말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과연 폭력의 유전이 끝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여덟 명의 인물이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는데도 심난하다거나 산만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도록 이야기나 장면 구성이 꽤 잘 짜인 영화였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늘어진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야외에서 연극 한 편을 하는 것 같았다’는 오달수 씨의 말이 이해도 됐다. 하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기에 러닝타임이 좀 길지 않나 싶다. 중간 중간 조금 더 짧아도 좋았을 장면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면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얘깃거리를 무겁지 않게 다룬 짜임새 있는 영화다.
'Hazy >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문(Moon, 2009)> (0) | 2010.01.01 |
---|---|
<쓰리 타임즈>세 가지 이야기 (0) | 2009.10.18 |
<사생결단> 시나리오의 힘 (0) | 2009.10.18 |
<마법사들> 아픈 기억과 치유가 공존하는 곳 (0) | 2009.10.18 |
<와일드> 뛰어난 기술에는 박수를(2006) (0) | 2009.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