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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05년 12월 29일 싸이월드 페이퍼와 씨네21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네'..이것이 내 첫번째 감상이었다. 지난 봄에 개봉했을 때, 다른 어떤 영화보다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다. 이 여자의 생활을 보면서 내 모습을 확인하게 될까봐 볼 수가 없었다.
예상대로 정혜의 일상은 나와 다르지 않았다. 적극적인 의미의 외출이나 접촉이 거의 없이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고 쇼핑도 통신을 통해서만 하는...
그래서인지 내게 정혜의 행동들은 모두 이해가능했다. 베란다의 화분들에 대한 애착, 길에서 주운 고양이에게 쏟는 애정, 초대한 남자가 오지 않았을 때 어떤 격한 감정의 표현 없이 하나씩 반찬에 씌운 랩을 벗겨 가며 밥을 먹는 것, 동료들과 가끔 술자리도 갖지만 정작 사소한 질문에도 원하는 답을 주지 않는 것, 간만에 나선 쇼핑에서 종업원의 과잉된 '친근한 척 하기'에 대한 불편함...심지어 낯선 취객을 모텔에 데려가서 이야기를 들어 주고 다독여 주고 나오는 행동도 내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행동임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
정혜에게 있어서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는 것은 다른 영화, 특히 'make over'류의 로맨스 장르에서 볼 수 있는 자신감
없는 여주인공들의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 내지는 '나도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는 자의식'과는 다르다. 그녀에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정혜의 고립은 자신이 과거로 인해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도망다녀서도, 과거를 '과오'로 생각해서 사람들을 피해서도
아니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일상을 살아가는 정혜가 집에 고양이를 들이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은 그 대상을 돌보고 싶고 잘 해 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물론 그 애정은 슬퍼하는 남자를 모텔에 데려다 주고 다독여 주는 애정과는 다르다.
후자는 상처를 가진 사람으로서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더라도) 느끼는 동병상련이면서도 자기치유의 한 가지 방법이다. 자신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에 그에게도 필요할 것이라는 이해였다. 하지만 고양이와 작가에 대한 애정은 그녀가 자신의 세계 밖으로 내미는 손이다. 상대방이 잡아주기를, 그녀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와 주기를 기대하는 손이다.
취객에 대한 행동은 대상을 완전한 타자로 보고 자신의 일상 밖의 존재로 대하지만 고양이와 작가에 대한 손짓은 자신의 일상을 함께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된다. 따라서 그녀에게 사랑은 받고 싶지만 자신이 없어서 망설였던 그것이 아니라 주고 싶고 하고 싶지만 내 일상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망설였던 그것이 된다.
정혜의 애정의 대상은 식물-동물-사람으로 옮겨간다. 유일한 대상이었던 화분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존재이고 움직이지도, 그녀에게 더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정혜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고양이는 정혜가 외부에서 들여온 첫 대상이다.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정혜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었고 작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조금 더 망설임이 필요한 대상이다. 그녀가 보여 주고 싶은 것 이상을 계속 묻는 동료들처럼 사람들은 요구가 많다. 그래서 섣불리 손을 내밀 수 없다. 준비된 것보다 더 많이 요구하고 그래서 서로 힘들어지면 또 다시 손을 거두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정혜는 용기를 내서 사람(작가남자)에게도 손을 내민다.
하지만 그가 잡지 않았을 때도 정혜는 아마 나처럼 생각했나 보다. '그럼 그렇지'라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장본인을 찾아갔을 때 끝내 생각대로 하지 않은 것은 용기가 없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도가 아니라 아마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자, 정혜>는 나의 '20대 마무리하기'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30대가 된다는 것이 정혜와 같은 폐쇄적인 20대를 보낸 내게 너무 억울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는 기회로 여기면 설레는 일이다.
여느 해와 다름 없이 단지 일년을 대표하는 숫자가 바뀔 뿐이고 20대와 30대라는 경계도 10진법을 사용할 때만 유의미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관습에 얽매인 인간인지라 왠지 서른이라는 나이와 함께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것 같고 변화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 10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혜를 보는 것은 자화상을 보는 것이었고 역설적으로, 이제 그런 일상에 마침표를 찍고 '다른 일상'을 시작하게 다독이는 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가 정혜의 행복한 내일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해피엔딩이라고 했다. 그것이 정혜가 '희망'을, '살아가기'를 '손내밀기'를 포기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말이 맞지만 정혜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을 예상하는 것이거나 그 이후까지 예상하는 것이라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정혜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미지수(어쩌면 아직은 '동물'에만 머무르고 싶을지도 모르니까)고 긍정적으로 대답한다고 해도 모든 것은 그의 인내심과 그녀의 속도에 달린 문제니까.
**어쩌면, 여성주의 시각으로 영화를 평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여성의 상처 극복이 남자(연애)에 달려 있다는 시선의 영화'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직접 이런 글을 본 것은 아니지만 여성주의적으로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서...- 하지만 이 영화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한 '사람'이 손을 내미는 이야기이지 '여자'가 남자에 대한(또는 의한) 사랑으로 마음을 여는 이야기가 아니다. 만약 정혜가 동성애자라서 그 연애 감정의 대상이 여자였다면-영화에서 다른 것 다 그대로 두고-그렇게 비판할까?
**씨네21에서 <여자 정혜>에 별점을 무지 짜게 준 어떤 평론가 대담을 봤는데...그분은 아마 이렇게 오랫동안 상처를 극복하지도 덮어두지도 못하고 그걸 끌어 안은 채 자신을 갉아먹는 삶을 사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마, 많은, 자의식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사람들이(여자라하더라도) 그럴 거다...그 평론가의 평은 영화에 대한 평이라기 보다 이해할 수 없는(또는 이해하지 않을)'정혜'라는 인물의 삶에 대한 평 같았다. 그래서..조금 불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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