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들의 공통된 취미일 것이라 짐작되는 '괜찮은 프로그램 나올 때까지 케이블 채널 마구 돌리기'를 하던 중 <인어공주>를 발견했다. 그동안 '언젠가 한 번 보지'라는 생각은 했지만 비디오 대여점에 가거나 TV에서 상영하는 것을 봐도 별 끌림이 없어서 아직 한 번도 안 본 영화였다.
덕분에 1/3 정도는 놓치고 본 셈이지만 오늘도 놓쳤다면 아마 몇 년이 지난 후 무료한 채널 돌리기 끝에 이 영화를 봤을테고 그 때는 이미 타이밍의 문제로 인해 별 느낌 없이 '괜찮네' 또는 '무난하네'라는 말로 감상을 끝냈을 것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감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우리 부모님이 만나고 결혼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아주 세세하게는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대강은 알고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이던 엄마를 아빠가 짝사랑했다는 것, 만족스럽지 않은 아빠의 모습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하셨고 그런 과정에서 엄마가 두 분에게 매우 실망했다는 것, 결국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감행하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결혼식에 참석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 등. 어린 나에게는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그런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지면서 '엄마는 과연 아빠를 그렇게까지 사랑해서 결혼했을까?'하는 '불경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 엄마가 내게 풀어 놓는 아빠에 대한 불만들로 인해 '우리 엄마 아빠는 언제까지나 젊은 부부들처럼 서로 아끼고 보듬는 관계일거야'라는 신화가 깨진 것도 한 몫했다.
또, 어쩌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아빠가 표현하는 것만큼 엄마가 표현하지 않는 것도 그랬다. 어려서는 그냥 표현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워낙 우리한테도 살가운 사람이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우리 엄마는 당연히 그러려니 한 거다. 하지만 우리에 대한 엄마의 태도가 바뀐 지금도 아빠에게만은 여전히 전과 같다. 아빠에게서는 때로는 아직도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애정이, 그리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30년 가까이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사람에 대한 애정이 보이는데 엄마에게서는 보기 어렵다.
그래서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는 가끔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는 어려서, 그리고 조금 커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동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고. 엄마가 반발한 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반대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잘 나지 못한 한 남자를 무시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였다는 것을 난 무시해 왔다고. 어쩌면 엄마는 애정이 아니라 연민에서 결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본 영화는 내게 속삭였다. '그들에게도 다른 이야기가 있을지도 몰라'
연순과 진국에게 나영이 모르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듯이, 나영이 과거로 돌아가 지켜 봤음에도 놓친 순간이 있었듯이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짧은 순간이나마 가슴 설레는 장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들의 시작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한 시간에도, 지금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의 다른 이야기가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내가 여전히 나이만 먹고 철이 들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엄마 아빠가 지금, 그리고 더 나중에 가끔 떠올리면서 슬며시 웃을 수 있는 추억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늙은 연순이 목욕탕에서 앉아서 옛날 진국의 행동을-나영이 과거로 돌아가서도 보지 못한- 떠올리며 살짝 웃는 것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다음 명절에 온 식구가 같이 TV를 볼 수 있는 날, 그 시간에 한번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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