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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y/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

Eternal Sunshine-이 모든 기억이 얼마나 행복한가!(06-01-09)

누구나 지우고 싶어하는 기억이 있다. (아...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란....) 정정하겠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여기 놀랍게도 아주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 일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기특하게도 이들은 의뢰인의 주변 사람들에게 의뢰인이 지운 기억 속의 그 대상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애프터 서비스까지도 잊지 않는다. (카우프만의 섬세함에 가장 감동먹은 부분이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감정 또는, 마음이란 참으로 가벼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도 몸에 남은 상처는 나를 아프게 해서 '내가 언제, 어디에서인지는 몰라도 다치기는 했구나'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마음이 다친 건 그렇게 지워버리면 아프지도 않으니 말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만큼 <라쿠나>가 개발한 기억 삭제 프로그램이란 녀석이 대단한 물건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터널 선샤인>..케이트 윈슬렛과 짐 캐리, 엘리야 우드 등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구미가 당기는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의 줄거리를 알게 되고는 -이 영화의 기획자들의 기대에 너무나 정확히 부응하여- 마치 관람이 의무 사항인 것 같았다. 내게도 지우고 싶은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서 없는 일로 만들고 싶은 일이 있었고 새해를 맞아 어느덧 햇수로 7년째가 되는 지금도 문득 문득 '없는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므로 너무 진부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매리가 반복해 인용하는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말과 '처녀의제비뽑기와 잊혀진 세상에 의해 망각해 가는 세상과 흠없는 마음에 비추는 영원의 빛과..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들은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니체의 경구처럼 기억을 지워 버린 후 지운 기억 속의 행동을 다시 반복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조엘은 자신이 지나 왔고 지나고 있고 지나갈 모든 시간 속의 일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찰리 카우프만과 미셸 공드리는 영화 속에 사랑의 기억을 지운 후 다시 그 대상에게 사랑을 느끼는 사람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여느 멜로 영화와 같은 운명적인 사랑의 등장은 아니다. 그/그녀/그들이 다시 똑같은 대상에게 호의를 느끼고 다가가길 원하는 것은 '운명'이라기보다 '패턴'과 '취향'의 문제로 보인다.

 그/그녀/그들은 단지 전과 변함 없는 취향, 변함 없는 패턴을 가지고 지내면서 같은 대상에 대한 나쁜 기억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다시 열중하는 것이다.


How happy...........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조엘이 기억 삭제를 멈추고 싶어 했던 것은 단지 자신과 클레멘타인 사이에 싸우고 상처를 주고 받은 기억뿐 아니라 빙판에 누워 생애 최고의 행복을 만끽한 순간도 있었음을 깨달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알렉산더 포프에게 이루어진 기도와 체념된 소망들이 동시에 행복한 무엇이었듯이 조엘에게는 클레멘타인을 만나고 알게된 후의 모든 시간이 지우고 싶지 않은, 오래 곱씹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수치스럽고 창피한 기억이 비록 발생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언정 여전히 내 삶의 단편으로 머리 속에서 그 기억의 수명이 다 할 때까지만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문득, 아직 <라쿠나>의 기억 삭제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기뻤다. 7년 전에 일어난 일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없는 일이면 좋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그 기억을 지우지 않은 것이 기뻤다. 하지만 나쁜 기억만을 되새긴 7년동안 그 일과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히 즐겁고 행복한 기억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e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ed.

-알렉산더 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