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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zy/바보 상자에 말 걸기

세경아, 세경아 우리 세경아

 제목 : 지붕뚫고 하이킥 39회
 방영 : MBC 11월 3일 저녁 7시 45분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이를 볼 때 종종 20대 초반의 나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세경이처럼 단돈 몇 만원을 들고 아무도 없는 서울 한복판에서 열 살도 안 된 동생을 책임지면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세경이에게 내 20대를 비춰 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내가 그녀에 비해 너무 편했기에 세경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내가 감히 세경이에게 감정 이입이 되기 시작한 것은 신애가 장래 희망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에피소드가 방영된 39회부터였다.
 
  지금은 빨리 돈을 모아서 세 식구가 함께 사는 것이 꿈이라고 의사나 사장님 같은 그런 꿈은 없다고 대답하는 세경을 보면서 신애가 독백을 시작한다.

  저는 세상에서 언니를 제일 사랑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언니에게 미안하지만
전, 솔직히 언니처럼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략)

 
  내가 몇 년 전에 동생에게서 들은 말과 비슷한 맥락의 말을 신애의 입을 통해 듣는 순간 나는 목이 메였다. 그리고 토닥토닥 세경이의 등을 두드려 주고 싶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놓치고 살게 된, 너무 일찍 큰 짐을 지게 된 세경이에게 '신애가 그렇듯이 네 안에도 별처럼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너도 꿈을 가지라고 세 식구가 함께 살게 된 후에 생각하면 어쩌면 그 때는 뭘 하고 싶은지 잃어버리거나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세경이의 많은 것이 이해된다. 아파도 미련하게 참고 고용주에게 조심스럽고 천 원짜리 한 장, 만 원짜리 한 장에 벌벌 떨고 남들이 버린 것도 버리지 못하는 그리고 누구보다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그 아이의 마음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세경이를 응원하게 된다.


  물론, 세경이를 답답하고 궁상 떠는 아이로 보는 시선도 있는 것 같지만 그건 어쩌면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닐까. 많은 드라마에서 세경이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젊은 여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그들이 보여 준 모습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쁜 옷도 많고 큰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당당하고 현실 속의 그녀들보다 돈도 더 잘 모으는, 현실과 좀 거리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세경이가 더욱 못난이로 보일 수 있지만 나는 그래서 그녀가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사실, 세경이는 보통 중산층 가정을 배경으로 하는 김병욱 월드에서 서민 대표선수라고 생각한다. 김병욱 감독은 지금까지 그의 세계의 배경이 된 가정보다 조금 더 자본가에 가까운 중소기업 대표의 집을 고르고 대신 그 집에 세경이 자매를 들였다. 세경 자매의 상황상 조금 극단적인 가난을 짊어지고는 있지만 어쨌든 세경 자매는 중산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우리들(나는 스스로를 서민 중에서도 서민이라고 생각하므로)을 대표하고 있다.

<지붕뚫고 하이킥> 49회

  물론, 매달 카드값에 허덕이고 낮은 스펙으로 취업이 되지 않는 정음이도 경제적, 사회적 비주류이고 광수도 인나도 서민 대표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가족 배경이 드러나지 않은 지금, 현재까지의 에피소드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를 이어가는 가난까지 보여 주는 즉, 이미 구조화 된 '빈익빈'까지도 함께 보여 주는 세경 자매야말로 서민 대표선수라할 수 있다.

  세경과 신애는 겨우 성북동에 일자리와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고 그래서 주인 할아버지와 아줌마에게 고마워하지만 그 집 안에서도 물질적인 약자로서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순재네 식구들이 옷을 찾는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노크도 없이 옷방 문을 벌컥벌컥 열어 대는 것은 작가나 PD가 무심한 것이 아니라 세경과 신애가 얼마나 비보호 상태에 있는지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세경이는 힘들고 버거워할지언정 절망에 빠지지는 않는다. 지훈이의 병원 후배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말을 찾지 못해서, 지훈이 옆자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초라해지고, 체육 특기생으로 학교에 다닐 기회가 사라져서 실망하고, 크리스마스 트리의 모든 전구가 다 켜지는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도 있을지 걱정하며 슬퍼하기는 하지만 세경이는 절망하고 비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욱 세경이의 손을 잡고 어깨를 빌려 주고 싶다. 앞으로도 이렇게 절망을 떨쳐내고 살라고 힘을 보태고 싶다. 앞으로 세상은 지금까지보다 더 냉혹할 것이고 아버지가 돌아와도 세경이를 둘러싼 상황들이 마법같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며 동화 같은 장밋빛 해피엔딩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면 더 많이 웃을 수 있고 더 많이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위로해 주고 싶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지붕뚫고 하이킥> 75회

선물을 주면서 살기 바란다. 작게는 휴식과 자장면 한 그릇부터 크게는 꿈을 꾸고 꿈을 조금씩 현실로 끄집어 내는 것까지. 그래서 신애가 언니를 사랑하고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말하도록, 세경이가 신애가 아니라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나는, 세경이가 다시 20대를 살 수 없는 나 대신 나보다 나은 10년을 보내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내가 <지붕뚫고 하이킥>을 놓치지 않고 보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세경아, 그 누구도 아니고 너를 위해서 버텨.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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