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이런 영화는 두 번, 아니 세 번째다. '벨벳 골드마인'과 '웰컴 투 동막골' 그리고 이놈...'왕의 남자'. 그래서 영화를 처음 본 후로 두 달이 다 돼 가도록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라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다. 직업 기고가도 아닌 주제에 꼭 써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은 새해 결심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의 두 영화와 이놈에게만 느낀 이상한 의무감이다.
사실, 감상을 미루는 동안 읽은 감상문과 영화평 중에서 강명석 씨의 <가질 수 없는 너>라는 글에 많은 부분 동감하고, 내가 <벨벳 골드마인>과 <왕의 남자>를 연장선상에 두는 이유가 단지 동성애와 예술가가 소재로 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임을 깨달으면서 '내가 굳이 내 감상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강명석 씨 글에 동감한 마음 외에도 아직 남아 있는 감상들이 있고 이렇게 해야 이놈과의 인연을 일단락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왕의 남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대체 뭐냐는 사람에게 나는 강명석 씨의 글처럼 '소유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리고 덧붙여 눈이 먼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공명하는 이야기다.
진짜 눈이 멀어서야 보게 되다.
맹인 연기를 즐겨 하다 진짜 맹인이 된 장생은 마음의 눈이 멀어 볼 수 없었던 것을 진짜 눈이 멀어서야 볼 수 있게 된다. 그제서야 그는
공길의 마음을 훔친 것은 자신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마지막으로 짝 맞춰 놀 수 있다.
장생은 스스로의 고백처럼 평생 이것 저것에 눈이 먼 자였다. 그 중에서도 '어느 광대 놈과 짝 맞춰 노는 것'은 그의 광대 인생을 통틀어 그를 눈 멀게 했다. 다른 것(엽전)에 눈 멀 때도 그의 눈을 가리고 있다. 광대 놀음을 빼고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는 그에게 광대 놀음은 공길과 '함께'여야만 하는 것이고 공길은 광대 놀음에서도, 인생에서도 짝패다. 즉, '짝 맞춰 노는 것'에 눈은 멀었으되 '노는 것'보다 '짝 맞추기'에 무게가 더 실렸다.
그렇게 눈 먼 장생은 하늘같은 꼭두쇠에게 대들고 양반집 사랑채에도 겁 없이 들어서고 피 묻은 공길의 손을 잡고 달아나며 용마루에 줄을 걸고 왕을 비난한다. 이런 행동의 원인은 정의감만이 아니다. 물론 옳은지 그른지도 중요하지만 그에게는 그 위에 공길이 자리잡고 있다.
공길에게, 공길을 향한 마음으로 눈 먼 장생이 보지 못한 것은 정작 중요한 '공길의 마음'이다. 나는 장생이 공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큰형'이나 '듬직한 친구'로만 여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광대로서, 남자로서 공길을 사랑했으며 자신도 알고 있다. 연산을 만나기 전까지는 장생도 공길도 마음을 쏟는 곳은 놀이판과 상대방뿐이었으므로 장생이 공길을 지키고자 한 것은 공길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낼 외부의 힘으로부터만이었지 그들의 관계를 위협할 존재가 없었다. 또한 두 광대놈은 서로가 있고 놀이판을 벌릴 수 있으면 만족했으므로 장생에게 있어 공길은 욕망의 대상인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아니, 적어도 늘 곁에 있어서 언젠가는 가지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대상이고 가지려고 안달해야 할 또는 그 욕망이 욕심으로 변질될 필요가 없는 대상이었다. 때문에 장생의 행동이 형이나 듬직한 친구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궁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진다.
연산에게 불려갔던 공길이 슬프거나 괴로워하는 기색없이 돌아오고, 눈빛 하나로, 말 한
마디로 뜻을 함께 해 온 공길이 장생과 다른 자신의 바람을 내어 놓는다. 관계가 위협당한다고 느끼면 사랑에 먼 눈은 더욱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장생 역시 관계에 위기를 느끼자 더욱 눈이 멀어 그 놈의 마음이 왜 움직이는지, 그 마음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고 질투만을 키운다.
이렇게 보면 왜 공길의 생각과 욕망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지가 확실해진다. 다른 인물보다 장생의 시선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공길의
머리와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공길은 '모르겠는 자'여야 한다.
장생은 궁을 떠나려 할 때도 공길이 희락원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몸을 움직인다. 공길의 생각과 상관없이 짐을 쌌으면서도 공길이 함께 가길 원했다. 애초에 공길의 부재는 장생의 삶에서도 놀이판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공길을 두고 나온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풀려난 장생이 굳이 돌아와 위험을 자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놀기 위해 사는 자이며 그 놀음은 공길이 있어야 의미가 있으므로 공길을 버리고 부지하는 목숨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공길도 마찬가지로 장생의 실명과 이어질 것이라 예상되는 죽음 앞에 공길도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한다.
광대에게 눈 먼 왕
연산은 왕으로서는, 불행한 과거에 눈 멀어 혜안을 갖지 못하고 개인으로서는 공길에게 또는 그 욕망에 눈 멀어 주변의 마음들이 어느곳을 향하는지 보지 못한다. 정치적으로 그를 과거의 법도에 얽어매고 옥죄는 것은 중신들이지만 스스로도 과거에 얽매여 실타래를 풀 수있는 기회를 놓치고 자신의 자리를 현명하게 이용할 방법을 보지 못한다. 결국은 화를 부르고 정치생명뿐 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만을 바라 보던 왕이 공길에게 눈이 먼다. 무겁고 어두운 곳에 던져진
자신의 운명과 달리 가볍고 밝은 놀이판을 만드는 광대의 재주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게다가 그 광대는 왕을 통해 바라는 것도
없는 순수함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향한 마음이자 안식처가 될 마음(녹수)을 보지 못하고 공길을 향한 마음도 보지 못하고 공길의 마음이
향한 곳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보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안 보는 것이기도 하다. 비방서 사건과 장생의 용마루 줄타기 사건에서 그는 서로를 위하는 두 광대의 울음을 본다. 후자에서 연산은 장생의 애틋함뿐 아니라 공길의 마음도 얼핏 보게 된다. 공길이 흘린 흥건한 피를 앞에 두고 외치는 '왜!'는 몰랐던 공길의 마음을 알게 된 표현이 아니라 의심하고 있었으나 무시하고 싶었던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을 확인하는 표현이다. 동시에 자신이 애정을 구하는 대상에게 또 다시 거절당한 아픔의 절규이다.
연산은 그제서야 눈을 뜬다. 자신을 거둬 줄 마음이 어디있는지 보이기에 치마폭 속으로 기어가고 공길을 보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보이기에 연회를 열어 줄을 맨다. 왕으로서도 눈을 떠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다. 그러나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마음들은 연산이 눈 멀었던 덕에 이미 깊이 상처 입고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공명하는 자 공길, 공명하게 하다
장생과 연산이 눈이 멀어 다른 이의 마음을 보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상처를 남긴 인물이라면 공길은 공명하는 자이다. 공명(共鳴)이란 남의 사상이나 의견에 공감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기도 하지만 물리 용어로, 어떤 물체가 외부로부터 자신과 같은 진동수의 진동을 받을 때 자신도 큰 진폭으로 진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설명하는 방법이 다를 뿐 두 개의 뜻이 동일함에도 내게는 왠지 <왕의 남자>에서의 공명은 후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영화 내내 공길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할 뿐 자신이 외부로 진동을 보내지 않는다. 초반에 등장하는 양반을 비롯해 장생과 연산 등 주변인물들이 공길에게 사로잡히지만 그것은 공길의 적극적인 자극이 아니므로 공길이 보내는 진동이 아니다. 공길 대사를 놀이판과 일상 생활로 나눈다면 놀이판의 비중이 훨씬 크다. 일상 생활 속의 대사도 상대방의 말(질문)에 대한 대꾸(대답)가 대부분이다.

물론, 공길이 공명할 때는 장생이 진동을 보냈을 때다. 영화 초반의 장님 놀이는 불안해하는 공길을 편하게 해 주려는 장생의 배려일 뿐 아니라 서로를 통한 자기 확인이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대화쌍은 장생과 공길이 서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놀이판에서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서 '나-너'의 관계임을 확인하는 문답행위이다. 이 놀이만으로도 두 인물은 공명하지만 장생이 나무가지를 주워 놀이를 시작할 때 공길이 금세 웃으며 뒤따르는 것 또한 이것에 대한 같은 진동수의 대꾸이다.
이런 공길이 연산을 만나 그 눈물을 손 끝으로 만질 때 처음으로 장생이 아닌 사람에게 공명한다. 그래서 공길은 연산을 떠날 수 없다. 연산의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느꼈기 때문에. 공길은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연산의 상처를 모른 척하고 떠날 수가 없었으며 지금까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장생도 자신의 마음을 알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공길은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불행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길은 공명하는 대상에서 공명하게 하는 주체가 된다. 줄 위에서 사설을 늘어 놓는 장생은 '야, 이 잡놈아'라는 말을 듣고 이 마지막 놀이판에 혼자가 아님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동안 보지 못한 진심을 본다. 그리고, <왕의 남자>에서 물리적인 의미의 '공명'을 느끼게 해 준 장면이 이어진다. 줄 위에 올라 선 공길이 흰 버선발로 줄을 퉁긴다. 장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이 장면은 소리 없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어'-'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대화이다.
서로가 없을 때는 생명력을 잃었던 두 존재가 줄 위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말 없이 마지막 놀이판을 계획하고 약속한다. 늘 진동에 반응하던 존재가 보내는 진동은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믿음을 확고히 한다. 다시 만나도 짝 맞추어 놀겠다는.
장생, 공길, 연산과 녹수가 멈춘 시간 이후에 어찌 될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극이 사람들에게 비애보다는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특히 장생과 공길이) 결국 마음을 맞췄기 때문이 아닐까? 마지막 순간이라해도 서로의 마음을 맞추었고 동일한 것을 추구함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을 야기했다 해도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내가 던진 질문에 '아,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대답으로 내 존재를 느끼게 해 줄 사람도 없는 내게 그들의, 줄 위에서의 마지막 공명은 대리 만족이며 나 자신에 대한 아픔이었다. 또한 스크린 위에 멈춰진 마지막 도약 이후의 비극을 생각하면 한참을 돌아서 마지막 순간에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아쉬움이 너무나 짙어서 다시 앞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또 상영관을 찾아 가고 있었다. 이렇게 흐느끼면서...
'나, 여기 있는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줄 너, 어디 있는가? 내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가?'
사족 : ..
성공 요인? 공명하는 영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을 찾는다. 추상적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요인은 '사람들과 공명하는 영화'라는 데 있다. 물론 두말 할 것도 없이 잘 만든 영화다. 잘 만든 영화기에 공명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인물간 관계와 감정의 애매모호함도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택한 것 같다. 영화는 또 모든 창작물은 유일한 최고의 구성과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구성, 최고의 방식이다. 고민하고 알맞은 결론을 찾았을 때에 잘 만든 작품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왕의 남자>는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동성애가 소재로 등장함에도 '동성애'의 고민과 갈등이 없다는 것도, 멜로영화인지 정치영화인지 알 수 없다는 것도 적절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강명석 씨의 글 제목처럼 <왕의 남자>는 '가질 수 없는 너'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것을 끌어 가는 인물로 신분의 극단에 위치한 왕과 광대를, 소재로 사랑의 감정을, 그 사랑의 종류로 동성애를, 이야기가 일어나는 장소로 궁을 등장시킨 것이다.
다시 한번, 잘 만들어진 영화는 사람들과 공명한다. <왕의 남자>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이 공명이 다각도에서 일어난다는 데 있다. 다면적인 울림은 영화의 스토리를 뒷받침하며 더욱 탄탄하게 하고 관객의 몰입 강도를 높인다. 영화 자체와 관객이 영화 속 인물과 관객이, 각 인물과 그 배역의 배우가 공명하고 배우들(인물들)이 서로 공명하며 영화와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울림을 주고 받는다.
영화 속에서 인물과 배우의 만남은 배우의 기술(연기력과 배역에 대한 노력) 또는 이미지를 기준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이때, 배우의 기술과 이미지가 둘다 그 인물에 맞아 떨어질 때 일어나는 상승 효과는 매우 크다. <왕의 남자>는 대부분의 배역에서 관객들에게 그런 평을 듣고 있고 주요 인물들이 조선시대의 연예인 격인 광대라는 점이 현대 사회의 광대일 수 있는 배우에 배역이 이입되는 정도를 강화시킨다. 게다가 인물들 사이의 조화만큼이나 각 배역의 배우들도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족2: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이 마케팅 전략이나 이준기 효과, 폐인들의 다시 보기 열풍으로만 돌리는 영화 관계자들이 좀 반성했으면 좋겠다.
사실, <왕의 남자>가 여세를 몰아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했으면 좋겠다. 이 영화를 좋아해서이기도 하고 -내 생각엔 꽤 잘 만든, 고민하고 만든 영화이므로-모범이 되었으면 싶기도 하지만 무엇 보다도 분단상황에 대한 감수성을 건드리지 않고도, 조폭을 소재로 쓰지 않고도 박수 받고 대중성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줬으면...하는 바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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