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zy/바보 상자에 말 걸기

<천만번 사랑해> 작가님 감독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천만 번 사랑해>는 챙겨 보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주말 저녁에 딱히 할 일이 없거나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을 때 하릴없이 틀어 놓는 방송이다.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다가 사귀게 되면서 재미가 반감하고 결혼하면서 더욱 재미없어졌지만 나름 제작진이 야심차게 준비해 놓았을 것이라 믿는, 또 하나의 갈등 요소가 미결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다. 물론 그 갈등 요소도 이번 주 방송을 통해 꽤 많은 사람에게 폭로되어 이제 그 마무리까지 어떻게 전개될지만 남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대충 보는 드라마에 대해서 내가 굳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드라마의 중요한 갈등 구조를 촉발시키는 방식이 내 신경을 자꾸 건드리기 때문이다.
 제목: 천만 번 사랑해
  방송: SBS 토,일 (8:50~ )
  출연: 이수경, 정겨운, 류진, 고은미, 이휘향, 김희철
 
   그건 바로 고은님(이수경)과 유빈이 사이에 존재하는 '물보다 진한 피'의 끈끈함이다. 유빈이는 은님이 시아주버니 부부의 아들이지만 사실은 은님이가 대리모가 되어 낳은 아이이다. 은님이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그리워하다 못해 찾으려고 하지만 찾지 못하고 유빈이가 그 아이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결혼 전부터 유빈이에게 마음이 간다. 유빈이 역시 누가 엄마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은님이가 가족이 되기 전부터 아니, 낯선 사람이었을 때부터 낯가림도 하지 않고 잘 따르고 다른 장난감이나 인형보다 은님이가 사 준 인형을 제일 좋아한다. 심지어 엄마가 아빠와 다투고 집을 나간 동안에도 은님이 덕에 엄마의 빈 자리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작가와 감독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유빈이가 다른 사람보다 유독 은님이를 따르는 것은 은님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마음이 따뜻하고 아이를 잃은 후 아이들에게 애틋해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엄마가 며칠씩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두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혈육의 정 때문에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한다는  설정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작가들이 '피가 무엇보다 진하고 강하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미안한 말이지만 피가 물보다 진한 것은 그 피가 나와 같은 피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백짓장을 사이에 두고 저쪽에 자석이 있음을 알리가 없는 철가루들이 헤쳐 모여 하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이 서로 잡아당기는 것이 매우 당연하고 일반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다. 물론, 자신도 알 수 없는 뭔가에 의해 이끌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은님와 유빈이처럼 노골적이면서도 키우고 있는 엄마를 외면하는 방식은 뭔가 논리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마치 은님이가 유빈이에게 맞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엄마가 없어도 유빈이가 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각주:1] 

  근래들어 가족 드라마를 표방한 드라마에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많이 사용한 내용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아이를 혼자 낳아 키우던 여자가 현재 자신을 챙겨 주는 남자와 아이 아빠 중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아이 아빠를 선택한다는 것이었다.[각주:2] 물론 여자 캐릭터가 아이 아빠에게 어느 정도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아이 아빠'라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도 그 부분에 집중 되어 있다.

  그런데 <천만 번 사랑해>는 이것을 넘어서 유빈과 은님 사이의 감정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그리고 있고 동시에 유빈이가 탄생한 순간부터 애정과 정성을 쏟아 키운 엄마를 슬프게 만들고 있다. 만일 제작진이 주말 저녁 시간대의 드라마 성격에 맞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의 결론을 내리려 한다면 이 갈등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는 예상이 된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든 불가사의한 '혈육의 정'의 끌림이라는 신화는 다양해지는 가족의 형태를 받아들이고 있는 사회 변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 변화에 순행할지 역행할지는 작가나 감독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 주장을 좀 더 그럴싸한 방법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천만 번 사랑해> 속에 담겨진 생각도 전근대적이지만 그 방법이 너무 억지스러우면서도 인위적이라서 드라마를 보면서 '설마 정말 작가와 감독이 이런 핏줄의 끈끈함이 존재한다고 정말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심을 할 정도였다.
  드라마에서도 영화 <가족의 탄생>과 같은 가족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직도 먼 일일까?






긴 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추천 버튼도 꾸~욱 눌러 주시고 여러분의 생각이나 느낌도 댓글로 남겨 주세요~

  1. 몇 회였는지까지 기억은 안 나지만, 김치를 전혀 먹지 않던 유빈이가 은님이가 유빈이를 위해 만든 특제 김치부침개를 매우 맛있게 먹는 장면이 있었다. [본문으로]
  2. 대표적인 사례로 KBS에서 방송한 <내사랑 금지옥엽>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보리(홍아름)는 결국 신호(지현우)와 결혼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