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부터 <파스타>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캔디 같은 여자 주인공에, 살짝 싸가지 없는 남자 주인공 그리고 여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남자와 남자 주인공에 미련을 못 버리는 잘난 여자가 나오는 흔한 로맨스라는 생각에 별 기대를 안 했다. 그런데 뒤늦게 재방송을 한 회 본 후로는 본방사수를 외치게 되었다. 처음의 예상이 틀렸다거나 매우 새로운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대단한 실력자에게서 사수를 받는 견습생의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서유경(공효진)과 최현욱(이선균)이 이성으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 이상으로 견습생과 스승으로 부딪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
또한 에피소드라든지 대사는 매우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흔한 설정에 비해 그다지 진부하지도 손발이 오그라들게 하지도 않아서 맛깔스럽다. 여기에 푸아그라나 피클에 대한 요리사의 윤리적인 자세를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굳이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고 외치는 최현욱이 셰프로 있는 식당이 아니더라도 위계질서가 엄격하게 지켜지고 남성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해서 여성에게는 조금 배타적인 주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파스타>가 덤으로 주는 재미이다.
8회(1월 26일 방송)를 채운 에피소드 역시 서유경이 그동안 캔디 캐릭터들이 보여준 미련함을 버리고 일반적으로 선택할 만한 행동을 해서 보는 사람의 허를 찔렀다. 식재료를 넣어 두는 냉동 창고에 갇힌 서유경이 갈등에 갈등을 거듭한 끝에 냉동 창고의 전원을 꺼 버린다. 당장 VIP 접대를 위해 써야 하는 비싼 재료들은 못 쓰게 되고 이를 안 현욱은 유경에게 '차라리 얼어 죽지 그랬냐'고 화를 낸다.
비록 모든 주방 식구들이 재료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해야 되는 민폐를 끼쳤지만 냉동 창고에서 쓰러져 있거나 최악의 경우 동사해서 끼치는 민폐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살아 있어야 요리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전원을 꺼 버렸다는 유경의 말처럼 살아서, 멀쩡하게 남아서 자신도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현욱 '너도 참 질겨'
내가 센스가 없어서 그런지 도저히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 말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유경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대꾸도 하지 않고 현욱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결국 식당을 뛰쳐 나갔다.
그런데 나는 현욱이 '너도 참 질겨. 사내 새끼들도 그 정도 혼나고 야단 맞으면 벌써 앞치마 집어 던지고 도망갔을 텐데 너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잖아. 변명도 하지 않고 투덜대지도 않고‥'라는 말을 할 때 유경 대신 현욱에게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다.
'여자가, 사내 새끼들도 도망갈 일에도 꿋꿋하게 버틸 정도로 질긴 게 아니라, 여자니까 버티는 겁니다, 셰프!'
가끔 사람들은 남자들의 무대에 섞여 들어 오는 '불순분자'인 여자가 남자들보다 더 독하게, 더 질기게 버티는 것을 보면서 '여자인데도 남자보다 더'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남자들의 무대에 섞여 있는 여자니까 버티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자기 주방에 여자는 없다면서 들어오자마자 여자 요리사들을 모두 해고해 버린 현욱의 밑에 다시 들어온 유경은 자신이 하는 행동은 뭐든지 빌미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어떤 빌미도 제공하면 안 되고 특히, '여자니까 할 수 없다'거나 '여자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행동은 보여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힘들 때 힘들어하고 혼나고 야단 맞을 때 주저 앉으면 안 된다. 게다가 그는 배울 게 많은 최고의 요리사고 밖에 나간들, 스펙도 부족하고 주방보조 3년 경력의 '여자' 요리사를 어디에서 받아 주겠는가.
듣고만 있는
이태리에서 현욱을 배신한 세영(이하늬)의 심정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세영의 행동이 정당하다거나 이해 가능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회가 워낙에 1등, 금메달만 기억하기도 하지만 사회의 어느 구석이든 여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2등이 아니라 1등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세영은 1등이라는 타이틀이 누구보다도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현욱의 졸업 작품을 망쳐 버린다. 만일 세영이 성별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대우 받는 사회에 있었더라도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러므로 셰프 최현욱이 세영에 대한 나쁜 기억으로 주방에서 여자들을 몰아내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도 진정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 것도 아니다. 단지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덮는 행동일 뿐이다. 그러니 셰프, 세영이와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나지 않으려면 당신이 여자 요리사를 몰아내지도, 차별하지도 않으면 된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추천 버튼도 꾸~욱 눌러 주시고 여러분의 생각이나 느낌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이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추천 버튼도 꾸~욱 눌러 주시고 여러분의 생각이나 느낌도 댓글로 남겨 주세요~
'Hazy > 바보 상자에 말 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덱스터]에 대한 일본식 대답 [조커:용서 받지 못할 수사관] (0) | 2010.09.12 |
---|---|
<지붕 뚫고 하이킥> 준혁 학생, 그 사랑도, 아픔도 사라질 날이 올 거예요. (0) | 2010.03.21 |
<지붕 뚫고 하이킥 96회> 세경과 준혁, 이제 갈등의 세계에 들어서다 (0) | 2010.01.28 |
<천만번 사랑해> 작가님 감독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0) | 2010.01.18 |
<공부의 신> 강석호 씨, 바람직한 룰을 만드는 것도 가르쳐 주나요? (3) | 2010.01.06 |